우리는 보학을 연구하는 대상으로 할 때 먼저 그 유래를 밝혀야 한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성씨의 동래설은 위험한 일이다. 고려 초의 대성들은 거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족보를 편찬함에 있어서 조상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그것을 찬양한다면 사적과는 맞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특히 관직명과 관직 품계에 있어서 시대적인 고증도 없이, 이를테면 고려의 관직이 조선조의 관직으로 기록되고 조선조의 관직이 고려조의 것으로 잘못 기록하기도 한다. 또 품계도 사실과는 달리 높여서 기록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된다. 이러한 것이 통페의 하나이다. 확실한 역사적인 고증 하에 학자냐 정치가냐 도덕이 높은 은일隱逸이냐 하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신중히 해서 선조에 욕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후손 된 도리일 것이다.
예부터 삼대무현관三代無顯官이면 그 가문은 문벌이 낮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당대의 자기 자신이 노력하여 출세하라는 격려의 말이지,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을 내세운다는 뜻은 아니다.
진실로 족보의 가치를 높이려면 사실事實 하나 하나가 고증과 전거典據에서 나온 기록이어야 한다.
특히 16세기부터 민중이 성장함에 따라 상. 천민 층의 양민화가 되며, 왜. 호 양란으로 신분질서가 해이되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양반가문이나 신흥세력을 새로 정비한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어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조선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략되어 군역을 지게되고,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게되므로 상민들은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며,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8세기 이후에 창간된 족보들은 대체로 시조 또는 선조가 신라 내지 고려조 왕실의 부마 또는 공신이거나 요직을 역임했다 등의 사적史籍에 맞지 않는 사례들이 허다했다.
조선 전기 족보는 대체로 사실에 충실한 반면, 18세기 이후에 창간된 족보는 당대인의 수록에는 대체로 충실하였으나 그 성의 유래, 선조세계에 관한 기록은 사실과 너무 다른 것이 많았다. 족보는 일족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값있는 씨족사로서 그것을 오래도록 보존하는데 의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