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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흥(金時興)
김녕김씨(金寧金氏)의 관조,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35세손으로 경순대왕 8세손이다.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을 거쳐 병부시랑 동북면 병마사(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 묘청(妙淸), 조광(趙匡) 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정당문학광록대부 평장사(政堂文學光祿大夫平章事)에 이르렀다.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향(金珦)
김녕군 시흥(時興)려 인종조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김극세(金克稅)
원정공(元靖公) 향(珦)의 아들로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거쳐 대광첨의찬성사(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김중원(金重源)
호는 미국(楣谷), 극세의 아들이다.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형부시랑,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였다.

김중보(金重輔)
극주의 아들로 정승성 정승(政丞省政丞)을 지냈으며 시회는 문간(文簡)이다.

김귀갑(金貴甲)
중원(重源)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역임하였다.

김현(金峴)
중원(重源)의 아들이며 중정대부 직문하(中正大夫直門下)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문제(金文齊)
중후(重後)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전라도 출척사(全羅道黜陟使) 및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고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김정병(金廷丙)
호는 회은(晦隱), 귀갑(貴甲)의 아들이다.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김정신(金挺申)
귀갑(貴甲)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순대부 전공사판서(正順大夫典工事判書)를 지내고 분성군(盆城君)에 봉군되었다.

김광저(金光儲)
자는 화중(華中), 호는 농암(壟岩)이다. 현(峴)의 아들로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김윤달(金潤達)
호는 호정(浩亭), 정병(挺丙)의 아들이다. 한림학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김질(金秩)
호는 송암(松菴), 정신(挺申)의 아들이다. 고려가 망하자 도고산(道高山)에 낙향, 태조 이성계가 옛정을 생각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임명하여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김순(金順)
자는 창여(昌汝), 호는 퇴휴당(退休堂) 광저(光儲)의 아들이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김천익(金天益)
일성(鎰成)의 아들로 문과급제하여 추밀원 좌승지(樞密院左承旨), 상장군(上將軍),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개녕군(開寧君)에 봉군되었다.

김익생(金益生)
호는 성재(省齋), 질(秩)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405(태종5)년에 왕명으로 효자정려가 내렸다. 남포진병마절제사(南浦鎭兵馬節制使)를 거쳐 명나라 황태자 책봉에 진하사(進賀使), 경상병마절제사(慶尙兵馬節制使), 한성부윤(漢城府尹),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고,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관(金觀)
호는 수헌(睡軒), 호판공(戶判公) 순(順)의 장자이다..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의 아버지이다.
호분위사좌령사직(虎賁衛司左領司直)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 받았고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김지(金智)
호판공(戶判公) 순(順)의 아들로 세종 때 벼슬길에 나가 통훈대부 군자감정(軍資監正)과 가선대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다.
1456년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장질(長姪)인 충의공(忠毅公) 문기와 현석(玄錫) 부자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산수와 풍월을 벗삼아 농사짓고 낚시로 일생을 마쳤으니 사람들은 공의 절의를 칭송하였다.

김존일(金存一)
이조판서 천익(天益)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문기(金文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1399(정종 1)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沃川郡伊院面白池里)에서 호조판서를 역임한 퇴휴당(退休堂) 순(順)의 손자이며 증영의정 관(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1426(세종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으면서 세종 13년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문관 검열 및 사간원 좌헌납을 거쳐 경상도 아사(亞使)와 안동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함길도 관찰사로 나갔다. 공은 변경의 각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장기대책을 건의하여 실행에 옮겨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 때 문종은 임종(臨終)을 맞아 김종서(金宗瑞)ㆍ민신(閔伸)ㆍ조극관(趙克寬)ㆍ김문기(金文起)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장래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때 이 명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은 조정의 중의(衆意)를 능히 이끌 수 있는 신망과 성실하고 강직한 인품이 있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공은 인품과 조정에서의 능력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아 정평이 나 있었기에 고명을 받드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다.

공은 1453(단종 1)년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는 이미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으로 넘어갔으나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키자 진략이 뛰어난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토평사로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에 임명되어 난을 마무리 짓고 북변의 소요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1455년 공조판서 겸 도진무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의 찬위(簒位)에 의분을 느끼고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결의하고 단종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구체적으로 지휘하였다. 이것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공은 자신 이외에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인 병력 동원을 맡았던 공이 심약했더라면 수 없는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지들을 보호하려는 의기를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으나 선왕의 고명을 지키기 위한 충절은 가히 하늘에 사무쳤으니 공은 끝내 사지를 찢기는 차열형(車裂刑)을 받아 순절하였다.

훗날 절의의 상징으로 일컬어졌던 사육신(死六臣)에 공이 제외되었던 것은 기록의 고찰에 소홀한 면도 있었다고 보겠다. 무엇보다 《조선실록》세조 2년 6월 병오일 조에 단종복위운동을 역률로 몰아 사형한 주모자 육신(六臣)의 이름 중에 뚜렷이 공의 이름이 올라 있음을 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공을 평가할 때 단순히 충절의 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지극한 효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의 깊이에서나 인품에서도 만인의 우러름을 받았던 점이다. 그와 같은 기록을 여러 가지로 찾아볼 수 있으나 당대의 대문호이자 석학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은 역률에 의해 참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공의 이름 뒤에는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여러 사우(祠宇)에 모셔졌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공이 충절의 정신으로 몸을 바친 지 275년이 지난 뒤인 1731(영조 7)년에야 복관작되고 충의(忠毅)로 시호를 받았다. 1977년 9월 22일에는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 및 《숙모지(肅慕誌)》 등 고증에 의하여 국사편찬위원회가 ‘세조 때 이미 가려진 사육신(死六臣)’임을 확인하여 사단(史斷)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노량진 사육신공원 사육신묘역에 가묘를 봉분하고 의절사(義節祠)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성역화하였다.
김효온(金孝溫)
자는 백원(伯源), 지(智)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김효신(金孝信)
지(智)의 아들,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조참판(吏曹參判),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준(金遵)
자는 응원(應遠)이며, 호는 만지당(晩池堂)이며 운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숙공 안숭선(安崇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숙공의 사위가 되었다.
세종 때 병조판서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에 이르렀다.
장인 안숭선이 고흥으로 도임(到任)할 때 따라가서 지금의 과역면 가산리에 정주하고 못을 파 연꽃을 심어 고기를 기르며 호를 만지당이라 하였다.

김현석(金玄錫)
호는 여병재(如甁齋)로 아버지는 충의공(忠毅公) 문기(文起)이다.
생원시험에 합격하고 거창현감(居昌縣監)과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지냈는데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아버지와 같이 순절하였다.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정직하였다. 항상 군민(郡民)들을 사랑하고 청백하였다. 거창(居昌)에 송덕비, 영월에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김충주(金忠柱)
호는 탄옹(炭翁), 문기의 손자로 단종사화로 형제들과 예속(隸屬)되어 가다가 마하산(麻霞山)에 숨어 살며 숯을 구워 연명하였다. 단종이 계신 영월쪽을 바라보면 바위에서 울었다 하여 망월암(望越岩)이 있고, 눈물을 소나무에 매양 뿌려 소나무가 말라죽어 고송정(古松亭)이라 하였다. 고종 7년 효자정려가 내려졌으니 조부 충의공부터 5대가 왕명으로 정려가 내려 오정각(五旌閣)이라 부른다.

김구룡(金九龍)
자는 회운(會雲), 호는 봉계(鳳溪)로 영돈녕부사를 지낸 준(遵)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사헌부지평을 지낸 원경(元慶)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자헌대부행병참판(資憲大夫行兵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준영(金俊榮)
자는 태진(泰晋), 호는 동악(東岳), 돈녕부지사 분산군(盆山君) 석숭(錫崇)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2세의 고령인데도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임금의 어가를 시위하여 무사히 피난시켰으며, 다시 한양으로 환도할 때도 역시 어가를 끝까지 지성으로 시위하여 무사히 환도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공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분성군(大匡輔國崇祿大夫盆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숙종은 충신정려와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부조묘에 모시라는 은전을 내렸다.

김영년(金永年)
자는 경로(敬老), 호는 겁암(怯岩)이며 명지(明之)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호벌치(胡伐峙)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찬(撰)한 《회맹록호남절의록(會盟錄湖南節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김복룡(金福龍)
유광(有光)의 아들이다. 선조 때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졌다.

김경의(金敬義)
호는 매헌(梅軒), 인선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해남현감을 거쳐 형조참판, 훈련원지훈련원사(訓練院知訓鍊院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김응수(金應壽)
자는 남로(南老), 분릉군 김복룡(金福龍)의 아들이다. 임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어가를 시위하였다.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삼등에 녹훈되었고,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증직되었으며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에 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복증(復贈)되었다.

김유부(金有富)
호는 어초와(魚樵窩),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윤원(允元)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업고 팔공산(八公山), 밀양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이등원종공신(宣武二等原從功臣)이 되고 사후 좌승지겸경연참찬관(左承旨兼慶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김정구(金鼎九)
호는 치옹(痴翁)이며 병조참판 계원의 아들이다. 충좌위사정(忠佐衛司正)을 지내고 공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김경세(金景世)
자는 현보(賢甫), 호는 계은(溪隱)이며 귀중(貴中)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고, 1636(인조 14)년 2월 청나라가 침입하여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니 공주(公州)로 가서 청군과 여러 번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광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순조는 공의 처와 장자를 칭찬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주었다.

시림영원 분성여예 가풍세덕 부충부열(始林靈源 盆城餘裔 家風世德 夫忠婦烈 : 성스러운 시림에서 나신 분을 근원하여 분성군 후예이라. 가풍은 대대로 덕을 쌓으니 지아비는 충신이요, 아내는 열녀일세)

순조 때 충신정려의 왕명이 내렸고, 통정대부 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 규장각직제학(通政大夫佐副承旨兼經筵參贊官奎章閣直提學)을 증직받았으며 상산군(常山君)에 붕군되고, 다시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오위도충부도총관에 추증되고, 충경(忠敬)의 시호를 받았다.

김흔(金欣)
자는 덕경(德卿), 호는 금은(錦隱)으로 수동(秀棟)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에 오르고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증직하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몽상(金夢祥)
아버지는 분성군 응수(應壽)이다. 임란 때 선조 임금의 의주 피난길을 시위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분흥군(盆興君)에 봉해졌다.

김언공(金彦恭)
자는 효즉(孝則), 호는 묵재(?齋) 또는 묵헌(?軒)으로 아버지는 제용감첨정 상걸(商傑)이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시에 능통하였고 23세에 향시에 으뜸으로 뽑혀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올랐으며, 무과에 합격한 후 아버님의 삼년상을 마친 다음 판관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출정하여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다.

김귀희(金貴希)
자는 희서(希瑞), 호는 노곡(魯谷)으로 덕해(德海)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동으로 불렸으며 커서는 완력과 담력이 세고, 지략이 뛰어나 1591년 장사군관(壯士軍官)에 뽑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순찰사 김수의 막료로 왜적과 싸웠고, 고향에 돌아와 의병에 가담하여 영천성(永川城)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의 전부총장(前部摠將)이 되어 경주의 적을 추격하여 계연에서 대파하였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에 올랐다. 공의 실기(實記)인 《노곡실기》에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전한다.

김세좌(金世佐)
형조판서를 지내고 분계군(盆溪君)에 봉해졌다.

김석산(金碩山)
자는 성관(聖寬), 호는 잠헌(箴軒), 변란을 평정하고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임해군(臨海君)에 봉군되었다.

김치규(金致奎)
초명은 치범(致範), 자는 여홍(汝弘)으로 익보(益寶)의 아들이다.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역임하였고 1849(헌종 15)년에 가락국의 김수로왕 후손을 선김해(先金海),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신라의 경순대왕 후손을 후김해(後金海)로 불러 왔기에 혼돈으로 여러 가지 지장을 초래함에 경순대왕 계열인 김녕군(金寧君) 시흥(時興)의 후손은 관향을 김녕(金寧)으로 갖게 해달라고 예조에 경상도 유학(儒學)들과 앞장서 탄원서를 냄으로 본관을 김녕김씨로 쓰게 되었다.

김치일(金致一)
자는 관여(寬汝), 호는 경은(耕隱)으로 익보의 아들이다.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을 역임하였고 효행이 뛰어나 《품천지(品川誌)》와 《금릉군지》에 기록되었다.

김진행(金鎭行)
자는 윤서(允瑞), 광옥(光玉)의 아들이다.
효행이 뛰어나 1893(고종 30)년 효자정려의 왕명을 받았고, 증조봉대부 동몽교관(贈朝奉大夫童蒙敎官)이 되었다. 한국씨족통보 《만성보(萬姓譜)》에 김녕김씨로써는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용식(金溶軾)
고종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기명(金沂明)
자는 성오(聲五), 호는 화계(華溪)로 규상(奎相)의 아들이다.
1859년 무과에 합격하여 1866년 훈련원도감(訓練院都監)으로 있을 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의 목을 베어 바치는 큰 공을 세우고 승리하니 고종은 영장(營將)으로 승진시키고 공의 이력을 어병(御屛)에 제명(題名)하고 웅천현감(雄川縣監)에 제수하였다. 1863년 어전무술대회(御前武術大會)에서 이름을 떨쳐 강화도중군(江華島中軍)이 되었으며 다대진수군절제사(多大津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김도현(金道鉉)
호는 벽산, 성하(性河)의 아들이다. 한말 의병장으로 영해대진(領海大津) 앞바다에서 순절하였다.

김근배(金根培)
자는 광원(光元), 아버지는 현교(顯敎)이다.
겨우 7살 때 백재(柏齋) 김상호(金尙鎬)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고, 총명하여 일찍이 문장이 뛰어나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20세에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1908년 삭발령이 내리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부모님의 유체를 훼상하고 선왕의 법복을 바꾸어 입은 것은 야만인의 풍속이라. 나는 차마 못하겠다.”하며 자취를 감추기도 했지만 망국을 슬펴하다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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