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891번에 대하여 참고사항을 올립니다.
1987년 4월 김녕종보에 공지됐던 사항으로 당시에 어떤 연유로 `영사공파`로 개칭한 것인지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이미 대동보에 개칭 사항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2025.03.19.
영사공파 29세손 局彬 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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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敦寧公派를 「領事公派」로 呼稱
(1987. 4 金寧宗報에 揭載)
金寧金氏는 汎新羅金氏로서 敬順大王의 第四子 諱殷說 大安君의 七世孫인 諱時興 諡文烈公은 高麗 仁宗때 金寧君(金州君)을 封君 받은金寧金氏의 貫祖이다.
그후 근 천년의 근본을 갖고 그 후손이 전국 각지에 1백만명 가까이 흩어져 살고 있는 大氏族으로서 領事公派를 비롯하여 忠貞公派 忠毅公派등 크고 작은 계파가 31개로 분파되어 있는 바 그중 長派(宗派)의 派祖가 朝鮮朝 端宗때 敦寧府領事(正一品)를 역임하신 諱遵 號晚池堂이다.
옛부터 派祖의 관직명을 따라 領事公派 또는 領敦寧公派라고 호칭하여 왔었던 바 금번 發刊되는 大同譜부터는 領事公派라고 호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宗中의 重鎭會議에서 결의가 되었기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敦寧府領事라는 관청에 대한 직무와 역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敦寧의 意味
조선왕조 초기에 왕실의 친척, 즉 왕의 동성은 9촌이내, 異姓은 6촌이내, 왕비와 동성은 8촌이내, 이성은 5촌이내. 세자빈의 동성은 6촌이내, 이성은 3촌이내의 사람들을 가리켜 「敦寧」이라 하였다.
p.188
2) 敦寧府에 대하여
조선왕조 초기부터 말기 가까이까지 있었던 직제로서 왕실내의 가까운 친척, 즉 위의 「敦寧」의 친밀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를 관장하던 官廳으로서 그 이름을 「敦寧府」라고 하였으며 그에 속하였던 관직은 그 수장이 領事(正一品)이고 그 다음부터 判事(從一品), 知事(正二品), 同知事(從二品), 都正(正三品), 副正(從三品). 僉正(正四品), 判官(從五品), 主簿(從六品), 直長(從七品), 奉事(從八品), 參奉(從九品) 의 관원을 두고 있었다.
3) 領事라는 관직은 정1품으로서 품계는 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조선조에서는 가장 높은 벼슬인 正一品級이다.
4) 領事를 두었던 관청은 敦寧府, 春秋館, 藝文館, 弘文館, 經筵廳, 中樞府 등이다.
5) 金寧金氏의 領事公後孫을 領事公派 또는 領敦寧公派라고 호칭하던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派祖의 관직명을 따라 領事公派 또는 領敦寧公派라고 호칭하여 왔다.
6) 領敦寧公派라는 의미에 대하여 領敦寧이라는 어원은 敦寧府領事의 약칭이다. 바꾸어 말하면 敦寧府의 領라는 다섯 글자를 略하여 領字를 위에 붙여 領敦寧 또는 領敦寧府事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번에 領事公派로 부르자고 제의하고 결의한 것은 領事公派라고 호칭하게 되면 관직명 그대로 부르기 때문에 착오나 오발할 염려가 없으며 국사를 알면 당장 이해하기 쉽다.
이와 반대로 領敦寧公派로 호칭하고 보니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p.189
첫째, 五字로 되어 있어 부르기가 어렵다.
둘째, 五字를 부르기 어렵다고 하여 그 의미도 모르고 領字를 빼고「敦寧公派」라고 부르는 사람이 간혹 있으나 이는 전혀 뜻이 없고 사리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조에 대한 累가 된다.
셋째, 관직명에 領敦寧이라는 직명이 없으므로 이해하기 어렵다.
넷째, 錯誤나 敦寧公派라고 오발하기 쉽다.
다섯째, 領敦寧府事라고 하면 끝에 府事가 있어 지방관직인 正三品의 부사와 착각하거나 혼동하기 쉽다.
이와 같이 領敦寧公派라고 呼稱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언행에 착오가 생길 염려도 있고 실제 領字를 빼고 敦寧公派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기에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국가의 관직명 그대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여 금후부터는 領事公派라고 호칭하기로 領事公派 宗中에서 결의한 것이다.
全國宗親會 副會長
法務士 金炳泰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