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를 빛낸 인물이 많이 있으나
기록 발굴을 하지 못하여 알려 지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각 문중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이 있으시면
해당 지역 향토사학자 분들을 찾아 관련
근거 기록을 제공 하시면 우선 향토지에
등제 하시고 후일 시지(시사),군지(군사),
면지 편찬시에 기록을 올려 보존 할 수
있습니다.
현제 김녕김씨 중앙 종친회 홈페이지에
등제 되지 못한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등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래의 내용은 진사공파 종친분들과
연락을 하던중 알게 된 사실을
합천 문화원에 문의 해본 결과
실제로 기록이 있고 합천군사에
공식 기록으로 등제 되어
있는 글을 인용하여 참고로 올려 봅니다.
각 파의 각 문중에서는 선조분들을
기록 할 수 있어으면 합니다.
또한 유적도 중요 합니다.
사당(사우), 금석문 등 기타 여러가지
유물등을 기록 보존 하시면 영구히 기록이
남게 됩니다.
아울러 집안에 내려 오는 고서나
목판본 족보, 교지 등 집안에서 보관이
어려우시면 족보의 경우 서울 국립
중앙 도서관 족보실이 별도로 운영 되고
있어서 기증 하시면 도난이나 파손등의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란사 자료 전투일지, 교지 기타 등등
은 임란사 전문 박물관이 진주 국립 박물관에
기증 하시면 걱정 없이 영구 보존 되며,
또한 전사와 관련 시대 구분 없이 기증 할수
있는 곳은 용산 전쟁 기념관 입니다.
기증 하시면 기증 증서를 받을 수 있고
후일 책을 만들게 될때 기증 증서를 첨부
하여 제작 하면 자료의 행방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중 자료가 고서점가에서 판매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김난손(1543 ~1594)
본관은 김녕
자는 상보,
호는 삼기헌 이다.
그의 시조는
신라의 대보인김알지 이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4자 은열의 9세손인 시흥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그는 1543년(중종 38년) 계묘에
부사직인 김계창의 아들로 향리
에서 출생 하였다.
그는 고려 인종때 평장사로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 졌다.
그후 금주에 김녕대도호부가
설치되자 김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이어오다가
고려말 김녕이 김해로 지명이 변경되자
본관을 김해로 바꾸었으나
수로왕계의 김씨와 혼동되어
선김과 후김으로 구분 되다가
고종 2년 왕명에 의하여
다시 김녕으로 환원 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식년시에
무과에 급제 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왜구가
침입 하여 국토가 왜의 발에
짓밟 히고
나라의 운명이 어려움에
처하자
개탄하고 분기하여 의병을 모으고
창의에 동참 하였다.
그는 박사제의 지휘하에
향토를 지키니
향리의 봉선산에
진을 치고 침입하는 적에 대비
하였다.
난이 일어난 다음 해에 진주성이
함락 되자 왜적은 정진을
건너 의령 자굴산을 넘어 삼가에
침입 하였다.
이때 그는 봉성산 밑에서
적을 만나 싸웠으나 역부족 하여
적세를 당해 내지 못하고
전사 하였다.
이때 진에 같이 있던
아들 김시경이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나오려하자
적은 칼로 위협 하였으나
그의 효성에 감동되어 길을
열어 주니
쌍백면 안계리 뒷산 간자원에
장사 지냈다.
그는 부친의 죽음에 슬픔이 너무
깊어 밤낮 없이 곡 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더니 결국 실명되고
5개월 만에 사망 하였다."
<합천군사 제3권 문화 예술과 인물 문화재 성씨 에서
인용 2013년 12월 31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