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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와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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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유래와 보급과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6-01 08:16:24 조회수 6087 파일 :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가 형성되었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사회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따라서 자기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힘썼다. 그리고 각 씨족들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기 명칭이 있는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였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이름이나 거주하는 지명, 그리고 사물의 이름, 강. 산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우리나라의 성은 중국문화와 더불어 한자가 수입된 뒤 한자 성을 사용한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高씨라 하고, 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처음에는 여餘씨로 하다가 뒤에 부여夫餘씨라 하였으며,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이 있었고, 제3대 유리왕 때 6부(촌)에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 배裴. 등 6성을 주었다.하며,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하여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용한 뒤에 지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의 수용과정을 살펴보면 왕실부터 시작하여 귀족 관료 양반 및 천민 순으로 보급되어 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데서 고구려와 백제의 성씨를 후대에 계승하지 못하고, 신라계의 성씨를 중심으로 하여 후삼국 시대부터 한자 성이 보급되어 갔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 순수비에 이름만 있고, 성을 사용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그 당시 귀족 관료들도 다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주로 당나라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 장보고張保庫와 같이 당나라와 무역을 한 사람들은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에까지도 성을 쓰지 않았으며, 후삼국 시대 견훤 궁예의 부장,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의 부장들도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자식 성씨의 수용과 보급과정을 살펴보면 왕실과 중앙 귀족층에서는 그 수용시기가 대개 삼국시대부터 신라 하대에까지 이며, 지배층에게 성과 본관관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초기이며, 양반층에까지 확대 보급시기는 고려 일대에 걸쳐 보급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공신들과 통일사업에 협조했던 호족들에게 출신지를 본관으로 하여 성씨를 하사하였다.

개국공신 부장들인 홍술弘術은 홍유洪儒로, 백옥白玉은 배현경裵玄慶으로, 삼능산三能山을 신숭겸申崇謙으로 복사귀卜沙貴에게는 복사겸卜智謙으로 각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전국의 군 현을 개편하여 각 군현 마다에 토성土姓을 나누어주었다. 토성이란 토박이 성이라고도 하며 각 지역의 지배집단인 토착성씨를 말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본관本貫과 성姓으로 구성된 성씨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3성과 6성을 제외한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은 그때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본관과 성이라는 한국식 성씨제도가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일부귀족이나 관료계급이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고려 중기 문종9년(1055)에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응시 할 수 없는 조치를 내린 것을 보면 그때까지 성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성이 일반 민중에게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전체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천민들은 여전히 성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그들은 점차적으로 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스스로 신분을 상승시킴으로서 양반이 되어 필수적으로 성을 가지게 되고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하였지만, 그들에게 획기적으로 성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혹은 한말에 이르러 신분제도 타파로 노비제도가 페지됨에 따라 이들도 모두 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09년 새 민적법이 시행되면서부터 누구나 성과 본을 가지게끔 법제화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노비의 경우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하였으며, 거주지의 대성을 따르기도 하고, 대부분은 김. 이. 박 등의 대성을 따르기도 하여 명문대성이 더욱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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