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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의 사실성에 대한 생각?
작성자 ywkim53 작성일 2021-03-13 19:45:08 조회수 2165 파일 :

그동안 우리 김녕김씨 대동보, 대사성공파보 및 타집안 족보들을 검토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그곳에 담긴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대부분 이들은 뿌리가 양반이다.

그렇다면 당시 양민과 노비는 모두 사라졌고, 양반후예만 남은 것일까?

족보를 보면, 자신의 뿌리를 과시하기 위해 선조들의 행적을 다소 부풀린 흔적이 여실하다. 또한 조선말,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타집안 족보에 자신들의 뿌리를 끼어넣었던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출신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을 지금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우리 대사성공파는 파세가 여타 파(특히 충의공파)보다 극히 미약하여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대사성공파에 끼어들지는 않았을거라 생각되며, 오히려 그것이 지금은 우리 대사성공파의 순혈을 유지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세조이후 당시를 사시던 우리 선조들의 입지가 어떠했는가이다.

1456년 단종복위거사 이후 공식기록으로 1480년 성종조에 삼한공(충의공의 종질)께서 초시(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신 사실로 부터 대과응시는 가능했을까이다.

만약 과거 응시가 가능했다면 왜 삼한공 후예들은 저익촌(구성면 상거리)을 거쳐 대덕산(덕산리)속으로 피신하신 것인가?

조선 조정의 탄압은 세조대가 가장 극심했고, 세월이 가면서 누그러졌을텐데 본인의 추정으로는 풍공(삼한공 훗대)께서 대덕산으로 이거하신 시기가 임란이후(아랫대에서부터 역으로 세대를 추적할 경우) 일거라고 생각되고, 삼한공의 아우이신 삼해공 후예들께서는 옥천 이원면에 계속 거주하시지 않으셨나.

그런 가운데 충의공 복권이 이루어진 영조이전에도 관직에 오르신 분들의 기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특히, 9세 효신공(충의공 종제) 후예들께서는 선조왕의 의주피난에 함께하셔서 14세 응수공은 분성군의 시호도 받으시고, 선조의 후비 순빈김씨(응수공과 사촌간)도 모두 우리 대사성공파에 속하신 분들이 아니셨는가.

그동안 본인이 알고 있던 조선시대 역적집안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기록들이라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런 점에서, 우리 족보에 등재된 세조대 이후 관직하신 분들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가 모르겠다.

출처 : 네이버카페 "김녕김씨 대사성공파(https://cafe.naver.com/daesasunggong/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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