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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상징 산악인 김홍빈 소개합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4-27 09:00:37 조회수 4493 파일 :

http://www.kimhongbin.com/

 

 

 

 

 

불길했던 꿈, 매킨리 단독 등반 중 5700m 캠프에서 조난

1991년 5월 22일 이후 며칠간 김홍빈은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의 데날리 패스(Denali Pass, 5,700m)에 쳐놓은 텐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통나무에 묶인 채 고깃덩이로 팔려가고 있었다. 험난한 산을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오히려 이들은 몸을 부위별로 흥정했다. 잠시 후 자동차에 매달린 채 끌려간 홍빈은 눈 덮인 밭고랑에 내려졌다. 그리곤 동이 틀 무렵 너럭바위 위에 올려지고 전기톱을 든 사람이 다가왔다. 주위 사람들에게 제발 자르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발뒤꿈치는 끝내 톱날에 잘려나가고 말았다. 깜빡깜빡 의식이 돌아왔다. 심장만 조금 뛰고 나머지는 모두 얼어붙은 듯했다. 엄마가 보였다. “너는 오래 살 테니 걱정 말라” 하시곤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의식을 잃고 말았다.

1991년 5월, 김홍빈은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에 발탁돼 8월말 시샤팡마(8,027m)-초오유(8,201m) 등반에 나서기로 돼 있었다. 그 동안 에베레스트(8,848m)와 낭가파르바트(8,125m)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기에 이번만큼은 꼭 정상에 올라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선배 산악인에게 함께 매킨리를 등반하자는 제의를 받자 고산등반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다. 그러나 선배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진보적인 등반을 경험할 겸 속전속결의 단독등반을 계획했다. 홍빈은 경비행기를 타고 해발 2,000m 높이의 설원에 내려선 이후 빙하를 거슬러 매킨리시티(4,200m)에 올라설 때까지 컨디션이 좋았다. 그로 인해 매킨리시티에서 적어도 이틀은 쉬는 게 바람직하다는 레인저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이튿날 헤드월(4,850m)에 짐을 올리고 그 다음날 마지막 캠프인 데날리빌리지(5,200m)에 올라섰다.

데날리빌리지에 닿았을 때 그는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설동()에서 지낼 계획으로 텐트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마침 데날리빌리지에는 한국 등반대가 머물고 있어 첫날은 그들의 텐트에서 보낼 수 있었고, 한국등반대와 함께 이튿날 정상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너무 떨어지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고, 캠프로 내려오자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한국 대원들간의 마찰이 일어나 일부는 정상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텐트에 그대로 머물렀다. 홍빈은 함께 있던 한국 대원의 태도가 못마땅해 하루 쉬고 등반하려던 계획을 접고 오후 1시경 이미 철수한 다른 한국 팀의 텐트가 그대로 있다는 데날리 패스(5,700m)로 향했다.

7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잘려나간 양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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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날리 패스에 도착해 하룻밤 지낸 그는 이튿날 아침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다리가 풀려 텐트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눈을 감으면 꿈속에 빠져들기를 수 차례-. 이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 그는 한국 등반대의 조난 신고로 레인저들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산밑까지 내려오는 사이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구조대원들은 홍빈을 눈썰매에 올려놓고 움직이지 않도록 로프로 묶은 게 그를 끌어내렸다. 가파른 사면을 내려가다 보면 몸이 밑으로 쏠리고 그럴 때마다 어깨를 감고 있는 로프가 몸을 조여왔다. 줄을 풀어달라 소리쳤지만, 구조대가 듣기에는 헛소리, 신음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왼쪽 어깨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무의식 중에서도 오른쪽 장갑을 벗고 축 늘어져 있는 왼팔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번. 몸이 풀리기는커녕 이제 오른손마저 얼어붙어 왔다.

매킨리시티에서 헬기로 앵커리지의 병원으로 후송된 김홍빈이 10여 일 뒤 정신을 잠시 되찾자 온몸에 온 동상 치료를 위해 따뜻한 물이 담긴 커다란 물통 속으로 옮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홍빈은 양손가락이 잘려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다만 꿈속에서 잘려나간 발뒤꿈치가 멀쩡한가 간혹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얼마 뒤 그의 양손가락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병원 측은 엉덩이 살을 옮겨 붙이는 등, 무려 7번이나 수술을 했으나 그 노력은 아무 소용없었다. 양손가락이 잘려나간 홍빈은 한동안 넋 나간 상태로 지냈다. 원망도 많이 했다. 차라리 텐트 속에서 죽어가도록 놔두지, 기왕 구조하려면 몸이 로프에 조여 피가 통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지 등등, 별별 원망을 다 했다.

홍빈의 처지를 너무나도 안쓰럽게 여긴 병원 측은 1억 5천여만 원에 이르는 엄청난 입원치료비를 받지 않고, 본인이 원한다면 미국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 역시 불구의 몸으로 고국에 돌아가느니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꼭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돌아와 어미가 지어준 밥을 먹어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소망을 떨칠 수 없었다. 사고 당한 지 석 달만의 귀국이었다. 비행기를 올라탔지만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면서 웃음을 띠려고 애를 썼지만 공항 대합실을 들어서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석 달간 꾹 참았던 눈물이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몽땅 쏟아져 나왔다.

냉혹한 사회 대신 따스하고 꿈 넘치는 산 택해

196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김홍빈은 대학시절 잘 나가는 스포츠맨이었다. 1983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간 그는 2학년 때 광주전남암벽대회에 출전, 2위에 오를 정도로 등반 기량이 부쩍 향상된 그는 89년 말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에 이어 199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도 참가했다. “고산등반을 제대로 하려면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곤 스키도 열심히 탔다. 그는 89년 동계 전국체전에 출전, 노르딕 개인전 2위에 입상하고, 그 해부터 91년 초까지 사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이애슬론 부문에서 1,2,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킨리 등반에서 열 손가락을 잃은 홍빈에게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마음대로 입는 것은 물론 대소변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약국 앞까지 다가섰던 게 수십 번이었다.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데는 선후배들의 도움이 컸다. 함께 살며 밥을 떠 먹여주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주었다.

선배의 권유로 장애인용 운전면허증을 따내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하기도 하고, 전산실에서 근무해보기도 했다. 골프장에서 포크레인 등 특수장비도 다뤄봤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모든 직업이 오래 가지 못했다. “특수장비는 잘 다뤘는데도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자격증을 따지 못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지낼 바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 마음먹었어요. 그게 산이었고, 첫 번째 목표가 7대륙 최고봉 등정이었어요.” 97년 여름, 김홍빈은 멀쩡한 산악인도 해내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아시아)를 비롯, 아콩카과(6,959m.남미), 매킨리(6,194m.북미), 킬리만자로(5,895m.아프리카), 엘브루즈(5,642m.유럽), 칼스텐즈(4,884m.오세아니아), 빈슨매시프(4,897m.남극) 등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겠다는 계획이었다.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오르겠다는 꿈.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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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대부분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빙하를 가로지르고 설벽을 넘어서면서 보란 듯이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했다. 97년 봄 일본 다테야마(3,015m)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 해 여름부터 엘브루즈를 시작으로, 98년 여름 매킨리에 이르기까지 4대륙 최고봉을 올랐다.

에베레스트는 걸림돌이었다. 2000년 봄 당시 14좌 등정 레이스를 펼치던 한왕용씨(밀레 홍보부장)의 도움으로 마나슬루(8,167m) 원정에 참가해 8,000m급 등반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해 가을에는 동갑내기인 김영식씨(대한산악연맹 청소년이사)의 도움으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매킨리 사고 때 폐수종과 뇌부종을 함께 앓았어요. 의사가 다시 고산에 가면 죽을 확률이 50%가 넘는다고 겁을 주셨어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적응속도가 매우 떨어졌어요. 대원 모두 저를 정상에 서게 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하지만 제 욕심만 차릴 수 없었어요. 그래서 캠프3(7,200m)에서 돌아섰어요.” 귀국 후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이듬해 2002년 매킨리 등정에 성공해 10년 만에 한을 풀었다. 이후 김홍빈은 에베레스트 재도전을 목표로 고소 경험을 쌓기 위해 레닌피크(7,134m.등정), 코스클락(7,028m.등정), 가셔브룸 2봉(8,047m.등정)과 시샤팡마(8,027m.등정)로 이어지는 고산 등반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김홍빈은 장애인 스키 선수로도 활약했다. 2000년 동계 전국체전 알파인 회전스키 장애인부에서 2위에 입상한 그는 장애인 스키 국가대표로서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과 2005년 오스트리아 티롤 IPC 유러피언컵 대회 등 2006년 국가대표 유니폼을 반납할 때까지 국제대회를 무려 9회나 참가했다. 2007년 봄 성공한 에베레스트 등정은 이러한 일련의 치열한 도전 과정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기까지 도와준 분들이 많았어요. 물질적으로 밀어고 건강을 챙겨주시고…. 정상에 오를 때 컨디션이 좋았어요. 이것 역시 후배들이 많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김홍빈은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고산 등반에 나설 때마다 배낭 깊숙이 간직하는 게 있다. 고 오희준(10개 고봉 등정)씨의 사진이다. 두 사람 역시 가셔브룸 원정 때 인연을 맺고, 에베레스트 등반을 마치면 낭가파르바트와 다울라기리(8,167m)를 같이 등반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김홍빈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캠프로 내려섰을 때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해발 7,900m 캠프에서 동료 대원과 함께 머물던 오희준씨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사고 소식이었다. “그래서 지난 가을 다울라기리 원정을 밀어붙였던 거예요.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산이거든요. 요즘 정상에 올라설 때마다 희준이 사진을 꺼내 봐요. 등반할 때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투정도 부리고 대화도 나눠요. 멋진 후배였어요.”

“삶은 처절할수록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 김홍빈씨의 꿈은 더욱 커졌다.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씨가 해냈고, 여성 산악인 오은선씨가 안나푸르나(8,09 1m)에서 끝을 맺으려 하는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이다. 9월 말 현재 오은선씨와 같은 루트로 안나푸르나를 등반중인 김홍빈씨는 가셔브룸 2봉(8,035m), 시샤팡마(8,027m), 마칼루(8,463m) 등 지난 봄 다울라기리(8,167m)에 이르기까지 고봉 5개를 등정했다. “저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싶은 마음에 ‘희망 만들기 원정대’란 타이틀을 걸고 고산 등반을 하고 있어요. 그에 앞서 우선 저한테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어요. 장애인으로서의 불편함을 이겨내고 장애 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제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어요. 삶은 처절할수록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네이버 지식백과] 등반가 김홍빈 - 8천미터 14좌에 도전한 희망 전도사 (등반가, 한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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